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5화 마스크의 재발견
내가 검진센터에서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건 코로나가 유행하기 훨씬 전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암에 걸렸었다. 그리고 항암 치료를 마치고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 다시 검진센터 일을 했을 때부터 줄곧 마스크를 썼다. 아무래도 면역기능이 떨어져서 감기도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고 더불어 손도 자주 씻고. 덕분에 겨울만 되면 달고 살던 감기가 사라졌다.
감기는 피했지만 항암 이후로 어려움은 좀 있었다. 첫째는 기억력.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 6개가 한 번에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세 자리씩 두 번을 확인해야 했다. 두 번째는 침이다. 비인두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이다 보니 입안의 여기저기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침샘은 영구적으로 망가질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도 접수할 때처럼 말을 많이 하면 금새 입안이 마른다. 세 번째는 종이 집기. 접수하면서 수검자에게 필요한 각종 검진기록지, 문진표를 한 장씩 집어 모아 클립으로 임시 고정하는데 그 한 장씩 집는 게 너무 힘들었다. 왜 그 얇은 종이 두 장이 분명히 겹쳐있는데 잘 안 떼지는 그런. 네 번째는 추위, 그해 겨울이 너무 추웠고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오죽하면 봄바람이 경이로웠을까. 이제는 종이 집는 것만 빼면 거의 다 좋아졌고 입안이 마르는 문제는 껌으로 풀고 있다.
그런데 보름 전쯤 토요일 잡무 때문에 검진센터에 남았다가 알아버렸다.
일과가 끝나서 문을 잠그고 혼자 있으니 마스크를 벗고 일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문진표를 집고 들추고 넘기는 동작을 빠르고 또 너무 쉽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지? 이 대목에서 이미 알아차린 분도 계실 텐데, 그렇다, 침이다.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게나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히며 종이를 넘기고 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세상에! 마스크가, 이 마스크가 절차기억을 막고 있다니.
이제 비밀을 알았으니 실리콘 골무도 써보고 문구용 스펀지로 대체해 보려는데 솔직히 침만 한 게 없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발생률이 100명당 65명인 한국의 현실에서 아직도 코로나에 안 걸린 행운을 생각하면 침은 포기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