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9화 평범한 수검자
업무 시작 15분 전, 옷을 갈아입고 검진센터에 내려오니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보인다. 나는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고는 안에서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렸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신 분의 성함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차트를 찾아 공단에 조회했다. 의료급여생애검진 대상이시다. 66세부터 적용되는 의료급여생애검진은 일반검진과 달리 혈액, 소변, 흉부엑스레이 검사와 혈압 측정이 없다. 나머지 문진표 작성이나 암검진은 똑같다. 이걸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늘 예약을 하셨단다. 오늘요? 접수대에 걸어 둔 예약자 명단에 빈칸은 보였지만 000님의 성함은 없었다.
날짜를 착각하시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 오늘 예약하신 게 맞는지 여쭤보니 변비가 심해 변 받기 힘들다는 이야기부터 많은 걸 말씀하시는데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시경검사는 예약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예약자를 관리하는 내과로 연락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000님이 어제 예약을 취소하신, 예약자 명단의 바로 저 빈칸의 주인공이셨던 것이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어차피 당신께서 취소하신 빈자리가 있으니 오늘 내시경을 하시겠냐고 여쭤보았다. 하신단다. 정말요? 하신단다. 다시 내과로 연락해 000님이 내시경을 하신다고 전한 다음 접수하고 신체 계측하고 문진표 작성을 도와드리고 마침내 내시경실로 들어가셨다.

내시경검사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고 준비하는 내과 샘과 뭐라 한참 대화가 오가는데. 그런데 가만히 듣자 하니 당신은 안 하고 싶은데 내가 하라고 해서 한다는 말씀으로 요약되었다. 나! 원! 참! 헛웃음이 나왔다. 얼마 뒤 내시경을 끝내고 나오셨다.
괜찮으세요? (제가 하시라고 했다구요?)
-아이고…
잘 하셨네요. (안 하신다는 걸 하시니 어떠신가요?)
-어험…
이제 이거 가지고 내과로 가셔서 설명 듣고 가시면 돼요. 결과는 다시 우편으로 보내드려요.
-흠…
물 드셔도 되구요. 변은 다음에, 급한 거 아니니까 올해 안에 갖다 주시면 됩니다.
-변비가 심해서…
검진센터의 흔한 일상이다.